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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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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다 며칠째 한철 비라도 쏟아질듯 하늘이 탁하다. 습한 바닷바람에 빨래를 말리려면 무던히 애를 써야 하는 계절이다. 연신 짠내만 배던 옷에 비릿하고 축축한 냄새가 풍기는 시기지만 날씨에 상관없이 비린내를 맡고 사는 입장에선 냄새 제거에 도가 트기 마련이다. 세탁기에서 꺼낸 빨래에 코를 댄다. 다행히 지난밤 묻은 얼룩은 보기로나 냄새로나 잘 제거된 모양이다. 그런 옷을 입느니 소금기 어린 바람에 삭은 옷을 입고 외출하는 게 낫다. 아니면 세제로 샤워하거나 향수로 목욕하고 말지. 근육이 당기는 감각에 몸을 수그린다. 투덜거림은 오래 가지 않고 느리게 걸어 소파에 앉는다. 이런 날씨에 활동까지 강제로 축소되는 삶이라니 운도 나쁘다. 거실 테이블에는 토마토 비즈가 달린 금속 책갈피가 책의 반쯤 되는 곳에 꽂혀 있다...
흙먼지와 오물이 뒤섞인 액체가 급히 방향을 꺾는 신코에 짓눌려 오래된 벽에 새로운 찌꺼기를 더한다. 좁은 골목길에 들이차는 비바람이 성기다. 누비는 바람 줄기 하나하나가 이리저리 뒤섞인 긴 기식으로 움직이는 귀곡성을 만든다. 두꺼운 천에 가려진 입이 힘찬 숨을 고르는 동안 뿌연 김이 오른다. 거친 벽에 등을 바짝 붙이고서 이리저리 엉킨 전선이나 실외기, 채 걷어내지 못한 빨래 따위가 드리우는 어둠에 몸을 숨긴다. 계획이 어그러지면 목숨 하나 붙들고 합류 지점에 도달하는 일이 첫 번째 지침이다. 요란스러운 사이렌 소리와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 같은 붉은 등이 번쩍거리는 게 차라리 낫다. 인적 하나 없는 어두운 길목 어디에서 울려 퍼지는지 모를 걸음 소리 하나 귀 기울이고 있다 보면 불안이 정신을 갉아먹는다...
별구름 무리 버터의 지글거리는 소리가 고소한 향취와 함께 퍼진다. 한쪽에 놓인 라디오에서는 Ruth Etting의 Love Me or Leave Me가 흘러나온다. 바삭하게 구워지는 토스트를 보며 나지막이 흥얼거리던 유진은 문득 입을 다물고 창을 한 차례 쳐다본다. 온 가족이 라디오를 듣는 오전에 선정할 만한 곡이 아니라서다. 창으로 내리쬐는 햇볕이 기분좋게 따사롭다. 볕이 따갑지 않아 아침결이 분명하다. 달칵. 이 시간에 들리지 않을 소음이다. 정리하지 않아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빗으로 대충 빗어 내리며 느린 걸음으로 나온다. 의자 다리가 끌린다. 유진은 한 차례 더 창을 확인하고 벽에 걸린 시계의 시침이 가리킨 곳을 의미 없이 본 후 입을 연다. “좋은 아침이야, 이오. 오늘 일이 바빠?” “좋은 아침, 유진. ..
영원의 영속성 ⧖ 인류의 DNA에는 미지를 선망하며 끌림과 낭만을 느끼는 고루함이 존재한다. 파훼 되면 감탄과 찬사가 아닌 허망한 탄식이 나오는 건 개인의 격차가 있을 테지만. 가령 창 너머로 보이는 한 줌만 한 우주를 하염없이 보는 남자가 지루한 인간이었음을 깨달은 것처럼 말이다. 발 디뎌본 적 없는 행성을 고향이자 옛 터전이라 일컬으며 그리워하고 돌아가기를 소망하는 인류는 희망을 품으면 어떤 감정을 품을까. 저 남자처럼 죽고 못 사는 시늉을 할지 아니면 무료한 낯과 같을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이목구비가 뚜렷해 훤칠한 얼굴에 다부진 체격, 시원하게 뻗은 팔다리를 보면 저 작자는 뭇사람의 마음 흔들기 좋게 생겼다. 본인이 알든 모르든 눈이 마주치면 냅다 미소부터 짓는 습관이라거나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 예의는..
파란의 색 *훼손된 신체, 교통사고, 죽음의 간접적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α 그건 마치 잠든 사람 같았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엔 검은 기름이 묻어 거뭇한 것 외에는 별다른 결점을 찾을 수 없었다. 연한 갈색이라고도 할 수 없고 밝은 금발이라고도 부르기 어려운 오묘한 색의 속눈썹 아래 눈이 무슨 빛인지 궁금했다. 억지로 눈을 벌려 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거야 너무 깊게 잠든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깨우면 안 될 것 같았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사이사이에 걸려 있었다. 잠결에 움직여 흐트러진 모습과 같았다. 딱 거기까지였다. 목에는 무딘 날을 가진 육중한 물체에 짓눌려 파쇄된 흔적이 있었다. 단추가 몇 개 뜯어진 와이셔츠는 색이 바랬고 목에서부터 흘러나온 푸른 액체가 희었을 옷을 푸르게 만들었다...
겨울 겨울의 아침은 다른 계절보다 고요하다. 채 걷히지 않은 어둠 속에서 침대 바깥으로 내디딘 발이 마룻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에 움츠러든다. 협탁에 놓인 안경을 드는 작은 소음 뒤로 선명해진 시야 덕에 냉기를 피해 슬리퍼에 안착한다. 추위는 자잘한 움직임마저 크게 와닿게 한다. 자고 일어나 부스스해진 머리의 남성은 슬리퍼를 직직 끌어 화장실로 향한다. 기상 후 일과를 마치고 손을 씻으면 이윽고 입에 칫솔이 물린다. 오랜만의 휴일을 맞아 푹 잤음에도 오래도록 자리한 눈 아래 거뭇한 그늘은 도통 나아질 기미가 없다. 조금 옅어진 것도 같은데. 지나가던 개가 들어도 비웃을 소리였으나 칫솔질도 잊고 눈 아래를 매만지는 이는 평소라면 개의치 않았을 특징을 몇 번이고 문댔다. 칫솔을 타고 거품이 흐를 때까지 말이다. 세..